[잔상으로부터의 위로] - 091013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아침이었다.
단지 의자에 비스름하게 걸터앉아 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더 구겨져 있었지만. 비담은 꽤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감,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지, 평소랑 똑같은데. 어째 좀 …….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웠나.
그렇게 멀거니 중얼거리다가 문득 언뜻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한 장면에 비담은 자기 이마를 내려치고야 말았다.
아 맞다! 꿈!!
*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검을 칼집에서 빼다, 넣다 탁탁 소리를 내며 손장난을 쳐도 이미 땅끝까지 추락한 기분이 좋아질 리 없었다. 정말 밥 생각도 들지 않아 방에 틀어박혀 간간히 욕지거리만 입에서 나올 뿐이었다. 스스로를 처연하고 가엾다 여기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겠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은 정말 불쌍해보였다. 그 조차도 자신이 한 잘못의 대한 벌이라 단정해 버리면 할 말은 없어졌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승부 조작 따위. 공주가 이루어 낼 대업의 비한다면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 완벽한 길이라는게 있단 말인가. 한참을 돌고 돌아, 바른 길로 정당한 길로 간다고 해도 결국 누군가 하나는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그럼 그 때는 어떻게 하게? 그 불만을 다시 듣고, 고치고, 다시 돌아가게? 그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대업을 이루냔 말이다. 비록 이루기 어려운 것이 대업이라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지만, 비담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런 길은 이루기 어려운게 아니라 이룰 수 없는게 대업이라는게 더 그럴 듯 해보였다. 그렇게 자기 주장을 꼼꼼히 되새겨 봐도 평소처럼 의기양양하게 자기합리화를 통해 간단히 결론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아마…….
젠장 난 잘 해보려고 한 거였단 말이야!
그 누구에게도 내뱉지 못한 변명이었다. 정말이다. 잘 해보려고 한 것 이었다. 일이 그르칠 줄은 생각도 못했으며, 설령 무언가 조금 잘못 되더라도 이렇게까지 비난 받을 것이라고는 예상 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을 엄히 바라보던 덕만 공주의 눈도, 분노로 소리치던 유신랑의 목소리도, 알천랑의 원성이나, 아직 멀었다 말씀하시는 스승님의 훈계 모두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었지만. 역시 가장 압권은 미실 새주의 말이라고 비담은 생각했다.
가장 인정하기 싫은건 미실의 말들 중 무엇 하나 완벽하게 아니다! 라고 반박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나는, 나는. 공주님께 잘 보이고 싶었던 것은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주군에게 잘 보이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던가? 물론 그 것이 미실의 말대로 연모인지 아닌지까지는 차마 고민하고 싶지도 않을만큼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어미에게 잘 보이고 싶어 투정부리는 아이라니.
내가 그랬던건가. 정말 나를 보아달라고 구차하게 그리 말하고 있었던건가. 그런데 혹시 그렇다 하여 그게 그렇게 조소를 당할만큼 나쁜 것인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날 버린 어미에게 나는 여기있다, 당신은 날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게 이렇게나 자존심이 상해 버둥거려야 할 정도로?
관자놀이부터 찡하게 아파오는 두통에 상을 찌푸렸다. 눈을 감고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손가락으로 누르며 일단 조금 쉬자, 머리를 비우고 조금 쉬자. 비담은 그날 밤 그렇게 애써 잠을 청하였었다.
*
"이게……, 이게 뭐야."
그 곳은 비재장이었다. 유신이 풍월주가 되는 순간 환호로 들썩이던 뜨거운 열기는 온데 간데 없이, 지나가는 낭도 하나 없이 한적하게 텅 빈. 내가 왜 이 곳에 있는거지? 의식을 좀더 명확히 차리려는 순간 멀찍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담랑이십니까."
먼 발치에서 천천히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매끄럽게 잘 차려입은 비단 옷에, 귀족이나 할 수 있는 값 비싼 장신구를 한 남자의 낮은 목소리는 어쩐지 귀에 익은 것이었다. 누구, 누구야? 아니 날 어떻게 아는거지? 그렇게 말을 하려고 하는데 어느새 가까이 온 남자는 조용히 손목을 그러잡는다. 커다란 손은 자신의 것과는 다르게 덜 거칠어 보이고, 잘 정리 되어 보였다. 놓으라며 손을 뿌리치려는데 어느 순간 가까이 붙은 듯한 남자가 속삭여 온다.
"비재에서 있었던 일은 소식 들었습니다."
"……너, 누구냐."
"마음이 많이 언짢으실 것 같아 걱정되어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이리 만나게 되니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냐니까."
"다치셨다는 발목은 괜찮으신겁니까. 의원에게는 보이셨나요."
"야!"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도 눈 앞에 있는 얼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이게 정말! 이를 으드득 가볍게 갈았다. 하지만 주먹부터 내지를 수 없는 이유는 손목을 잡고 있는 손, 아니 그 손이 생각보다 더 따뜻하여 그런 것이다. 오히려 남자는 양쪽 눈을 접으며 웃음을 보였다. 눈 웃음 위에 덧그려지는 쌍커풀이 너무나 익숙해 비담은 다시 자기 기억을 뒤집어 봐야 했다. 자신을 품에 안는 남자의 팔에 다시 머리가 하얗게 되긴 했지만.
"이 새끼가 뭐하는……!"
"제가."
단호한 음성이다. 비담의 말을 멈추게 하더니 품에 안은 비담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마주비비고는 다시 속삭여 온다.
"제가 누구인지가 중요합니까."
"누군지도 모르는 놈을 어떻게 믿어."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있더라도 당신은 그들의 신뢰를 받지 못할 터인데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뭐?"
"결국 저 밖에 없지 않습니까.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오직 저 하나 뿐일 터인데. 그런 제가 아니라면 대체 다른 누군가에게서 위안을 얻으시려 하시는 겁니까."
가볍게 등을 쓸더니 곧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온다.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어깨를 토닥이며 나는 당신에 곁에 있겠노라고 속삭인다. 비담은 그 품에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먹먹한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 네 이름이 뭐지? 남자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대답했다.
"……형종(炯宗)."
*
아. 하고 멍하니 비담은 탄성을 내질렀다. 맞아, 그런 꿈을 꿨었다. 드문드문 기억이 끊기긴 했지만. 하여튼 별 청승을 다 떠는구나, 고개를 몇번 저었지만 그래도 생각은 그 석연찮은 꿈으로 향했다. 그녀석 왠지 낯이 익었지.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그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분명히 본거는 같은데, 그런데…… 입고 있던 옷도 꽤 비싸보이는 놈이었는데. 그런 놈을 내가 어떻게 알지?
에라, 모르겠다.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고.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하지 뭐. 그의 길고 마른 손가락이 근처에 떨어진 거울을 잡았다. 무의식 중에 거울을 들여다 보다 그가 다시금 아아, 하고 허탈한 웃음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흐릿하던 기억이 더 명확해졌다. 꿈 속에서 본 이의 얼굴이 이제서야 떠올랐다. 낯선 이의 품이 왜 그리 편하였는지의 대한 이유도 간단해지고 말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서툴게 한번 쓸어내려 보고는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미소를 지었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께서 날 버리지 않았다면, 난 그렇게 크는건가? 한참을 키득거리다 그만 거울을 던져 버렸다. 날카로운 소리가 듣기 싫게 퍼졌다. 형종, 형종이라. 불현 듯 울컥 울어버리고 싶었다. 결국 밤새 그를 위로해 주었던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잔상. 내가 믿을 수 있고,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건 결국 나 하나 뿐이란건가. 다정스레 속삭이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비담은 채 울음이 되지 못한 웃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조각글] - 091124
한참 동안이나 몽롱한 기분인 듯 남자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곧 자신을 쳐다보고는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상황 파악이 완료 된건지 인상을 빡 썼다. 그 것이 재미있어 쿡쿡 웃자, 벌떡 일어나 한대 칠 듯이 다가와서는 멱살을 그러잡고 거칠게 묻는다.
"넌 또 왜 나타났어!?"
"그 이유를 제게 물으시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비담랑께서 저의 꿈을 꾸신 것이 그 이유니까요. 뒤이어 말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은 것인지 꽉 잡고 흔들던 멱살을 휙 놓는다. 열은 뻗치는데 차마 표출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몹시도 재미있었다. 이를 까득까득 갈며 성질을 내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물었다. 반은 궁금해서, 또 나머지 반은 조금 더 약을 올리고 싶어서.
"무엇이 그렇게도 화가 나시는 겁니까."
"왜, 네 놈은 잊을만 하면 꿈 속에 나타나고 지랄인건데!"
"제 의지로 되는 일도 아닌데, 그 것을 저에게 따지시면 저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과, 비담랑께서 살아가는 세상은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서로 다른 이공간입니다. 어느 한 쪽이 만나길 원한다고 만날 수 없단 말입니다. 비담과 형종은 같지만 다른 존재이니까요. 다만 어떤 특수한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이렇게 무의식의 상태 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길게 이어지는 설명에, 갈라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열심히 듣더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묻는다.
"그래서, 그 조건이라는게 뭔데?"
"모릅니다."
"뭐?"
"혹시 알게되더라도 별로 알려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안다는거야 모른다는거야!?"
역시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길고 마른 손가락을 단단히 모아 만든 주먹이 꽤나 단단해 보인다. 한숨을 푹 쉬고는 열이라도 좀 식히라는 생각으로 옆에 있는 부채로 슬슬 바람을 만들어주며 한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모릅니다. 태자 형종, 거짓을 입에 담지는 않습니다. 또한, 설령 알게되더라도 그걸 비담랑께는 알려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 왜!"
"그 조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시면, 비담랑께서는 저를 만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조건이 충족되지 않도록 행동하실 것 아닙니까."
이,이,이 개새끼가!!
있는대로 욕을 하며 날뛰는 모습은 결코 보기 좋다고 할 것은 못되었지만, 그래도 제법 색다르고 신선했다. 태자로 살아온 이십여 년동안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거친 욕설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무례한 언사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벼락 맞아 죽여버려도 시원 찮을 새끼가! 꿈 속이라서 별 수 없는거지, 넌 벌써 뒤지고도 남았어!!"
"하지만 말입니다, 비담랑."
"기분 나쁘니까, 이름 부르지 마!!"
"저라도 비담랑을 아끼고 귀애하니, 오히려 다행이 아닙니까. 저마저도 당신을 부정했으면 당신은…"
그제야 빽빽 악을 쓰던 것을 멈추고 휙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본다. 커다랗게 떠진 눈에는 불신이 가득하다. 한마디 대꾸도 없이 내쉬는 숨소리가 가여울 지경이다. 정말로 약점을 찔러버린걸까. 그는 다시 불같이 화를 낼까, 아니면 그런 애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비웃을까. 설마 울어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그의 반응을 가늠할 수가 없어 그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나와 같은 존재,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나 나와는 달랐다. 그의 약점을 모두 파악한 나의 앞에서는 그의 모든 방어수단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저 가볍게 건들였을 뿐인데도 곧 산산히 깨어져 부서질 것 같은 남자에게 다가가 팔을 벌렸다. 이를 갈며 분노로 가득 찬 표정의 그였지만, 곧 별 수 없이 품에 안겨올 것 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꿈에서 만난거라서 주먹도 안 먹혀, 칼도 안 먹혀 비담이는 그저 속 타서 죽고. 퀭한 모습으로 절에 나타나 일천배를 하고 있는 비담이를 보고 깜짝 놀란 스승님 or 공주님이 "네가 절에는 어인 일이냐?" 하고 물으면 수척해진 모습으로 대답하는겁니다. "꿈 속에 악귀가 나타나지 않게 해달라 빌고 있습니다." 그럼 그날 밤 형종이가 나타나 막막 놀리면서 "이제는 부처님마저 당신을 돕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비담랑. 이를 안타까워 어찌합니까?" 또, 분명히 자기랑 얼굴은 같은데 성격은 딴판인 비담이가 좋아서 밤마다 오늘도 비담이가 꿈에 나타나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형종 왕자님.